얼마나 살까?
라미아와 도깨비, 그리고 마피아 본문
그리스 신화에 보면 '라미아'(Lamia)라는 반인반수의 여자 괴물이 나온다.
제우스가 사랑한 여인이었으나 헤라여신의 질투로 아이를 잡아 먹는 괴물이 된 케이스다. 후대의 역사 기록에서 보면 라미아는 젊은 남성을 유혹해 정기를 빨아 먹는 악령 내지는 꽃뱀으로 묘사되고 있다.
라미아는 우리 문화에서 보면 일종의 도깨비다. 사람을 잡아 먹는. 한편으로 우리 문화에서는 사람을 도와주기도 한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도깨비는 언제나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신통방통한 능력을 지녔다. 이처럼 동서양의 역사와 관념이 다른 만큼 라미아가 우리의 도깨비와는 꼭 같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의 '대중과 진실'의 관계다.
라미아에 대한 언급과 기록은 소크라테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는 죽기 전 크리톤에게 한 마지막 변론에서, 대중들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지만, 그들의 결정 절차는 온당하므로 그리스의 국법을 받아들이겠노라 항변했다. 이 사실의 기록을 두고, 후대의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소크라테스가 대중의 의견을 '라미아'라고 불렀다며 자신의 스토아철학적 감상을 적고 있다. 실제 소크라테스가 대중의 생각과 의견을 '라미아'라고 언급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크리톤>의 사실기록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명상록>의 기록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중과 진실'에 대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소크라테스의 일화와 아우렐리우스의 인식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문성 없는 대중의 잘못된 판단 혹은 무지는 진실을 왜곡할 수도 있고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명상록>에서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무고함을 짓밟은 대중의 의견과 생각을 '라미아'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사람을 갉아 먹고, 진실을 왜곡해 골탕 먹이려 하는 작태와 현상을 라미아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마피아' 게임이 떠오른다.
사회자 한 명이 게임 참가 인원의 1/4이 채 되지 않는 인원의 ‘마피아’를 지목한다. 십여 명의 인원이 참석했다면 두세 명 정도가 마피아가 된다. 모든 참가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가운데 사회자는 머리를 건드리거나 어깨를 치는 방식으로 마피아들에게 암시를 주고, 그들은 조용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한다. 마피아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사회자와 마피아들뿐이다.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시민이 된다. 시민은 마피아가 누구인지 찾아내야 한다. 마피아로 지목된 사람은 참가자 과반수 이상의 찬반에 의해 생사가 결정된다. 단, 진짜 ‘마피아’가 마피아로 지목되어 죽으면 마피아 혼자 죽는 것이고, 무고한 시민이 마피아로 몰려 죽는다면 그 시민과 함께 또 다른 시민 한 명도 함께 희생되는 것이다.
게임이 끝날 때까지 시민들은 절대로 누가 마피아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결국 누군가 희생양이 되는 결과를 도출해 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다수결에 의해 진실과 상관없는 그들만의 ‘진실’이 결정되고 그것에 의해 때로 어이없는 희생이 빚어진다는 것은 얄궂게도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상황과 닮아 있지만, 이러한 상황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서도 자주 보인다.
사건을 만들어낸 그 누군가는 분명히 '진실'을 알지만, 이 '진실'이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로 확산되면 그에 대한 '동조'나 '반박 대응'이 나오기 마련이고, 각각 이를 믿는 사람들은 '각자의 진실'에 힘을 실어 준다. 결국 이 게임은 누군가의 희생이 나오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서서히 우리들을 갉아 먹고 분열시킨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 주요 이슈가 꼭 이와 같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래서인지 얼마전 방영된 드라마 도깨비가 회자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도깨비는 갈등을 줄이고 사람을 돕는 착한 도깨비였으므로.
- <톨스토이처럼 죽고싶다>(김별아)를 읽다가 떠오른 생각들 - (마피아에 대한 글 인용)